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닌의 난 (문단 편집) == 개요 == >大體今日の日本を知る爲に日本の歴史を研究するには、古代の歴史を研究する必要は殆どありませぬ、應仁の亂以後の歴史を知つて居つたらそれで澤山です。それ以前の事は外國の歴史と同じ位にしか感ぜられませぬが應仁の亂以後は我々の眞の身體骨肉に直接觸れた歴史であつて、これを本當に知つて居れば、それで日本歴史は十分だと言つていゝのであります。 >---- >오늘날의 일본을 대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일본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고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오닌의 난 이전에 일어난 일은 외국 역사와 비슷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반면, 그 이후의 일은 우리들의 진정한 신체 곳곳에 맞닿아있는 역사라서 그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으면 그걸로 일본 역사는 충분히 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 >[[나이토 코난]] - [[http://www.aozora.gr.jp/cards/000284/files/1734_21414.html|<오닌의 난에 대하여(應仁の亂に就て)> 1920년 8월]] ||[youtube(BjffpQjcMio)]|| || 역사다큐 / 오닌의 난, 전국시대의 시작 || ||[youtube(dH87nDtf3jo)]|| ||[[토크멘터리 전쟁사]] 98부 - 일본 전국시대 통일전쟁1 || 1467-1477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내란]]. [[전국시대(일본)|일본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키워드는 '하극상' 1467년이 일본의 [[연호]]로 오닌(應仁) 원년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름을 따서 '오닌의 난'이라고 한다. 1469년 연호가 '분메이(文明)'로 바뀌었고 내전은 1477년까지 계속돼 학술적으로는 '''오닌-분메이의 난(應仁·文明の亂)'''이라고도 부른다. [[미나모토]] 방계인 [[호소카와]] 가문의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호소카와 가에는 옛날에는 더 좋은 보물들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거의 불탔습니다. '''아,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오닌의 난 때.'''"라는 후덜덜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아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호소카와 가문은 오닌의 난을 주도한 가문 중 하나'''다.] 그는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부친이다. 동시기 [[조선]]은 [[세조(조선)|세조]], [[예종(조선)|예종]], [[성종(조선)|성종]] 때로, 이 난이 발발한 1467년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9027_003|1470년]]과 1473년에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409002_004|개략적인 내용]]이 1476년에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7026_005|사건의 상세 내용]]이 조선에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실록 본문에 오닌의 난 주동자가 두명 나오는데 "산명전(山名殿) 좌위독(佐衛督) 원지풍(源持豐) = 산명입도(山名入道)"는 야마나 소젠, "세천전(細川殿) 우경 대부(右京大夫) 원승원(源勝元)=세천 우경대부(細川右京大夫)"는 호소카와 카츠모토다.][* 둘다 미나모토의 후손을 칭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둘을 각각 미나모토 모치토요(源持豐)(야마나 소젠의 이전 이름), 미나모토 카츠모토(源勝元)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닌의 난으로 일본이 혼란기에 빠져가고, 중국은 명나라의 치세 아래 안정기에 있어 조선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